고백은 나의 것

이드

 

   메구미 눈에 고죠는 언제나 완성된 인간이자 어른이었다. 물론 이타도리와 쿠기사키는 해당 견해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메구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적 없다. 고죠 사토루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고, 단단한 육체와 누구에게도 상처 입지 않는 고결한 영혼을 갖췄다고. 그에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 남자의 주머니 속에는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게 담겼다. 고죠는 어디에서나 존재하고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게 그의 이름을 속삭이기만 하면, 제 손바닥 위에 모습을 드러내곤 환히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완벽이란 단어를 마주치면 어쩔 수 없이 고죠를 떠올렸다. 그것은 메구미가 기억하는 최초가 그의 미성년이 거의 끝나버린 때에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열아홉을 목전에 둔 그를 지금 와 재회하게 되었을 때. 

 

   이렇게 여린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날은 확실히 이상한 날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기숙사로 들이닥친 고죠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잠결인 메구미를 붙잡곤 징징거렸다. 이미 교내에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신이 교사잖아. 수업해야죠. 화요일밖에 안 됐다고요. 메구미가 귀찮은 얼굴로 내뱉었으나 핀잔은 그의 무하한을 뚫지 못했다. 울상인 고죠는 자신이 갱년기에 접어든 것 같다는 징그러운 소릴 했다. 최근 들어 잦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부정맥이 뛴다나. 말마따나 오늘따라 심히 기분이 오락가락해 보이는 고죠의 안색을 살폈으나 딱히 특이점은 없었다. 예의…, 그 낯짝. 메구미는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있던 고죠의 머리를 침대로 팽개치곤 씻으러 가버렸고,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돌아왔을 땐 고죠가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며 우뚝 굳어 있는 채였다. 어깨너머로 본 메시지 속엔 야가 학장의 긴급 호출이 담겼다. 그것도 해외 출장. 타이밍 좋게―혹은 나쁘게.―수업이 박살 날 이유가 정말로 생겨버린 게 그날의 첫 번째 이변이었다. 다녀오세요. 하고서 마저 교복 단추를 끼우던 메구미가 너무 무심한 태도였다는 이유로 고죠는 이지치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탈 때까지도 칭얼거리며 메구미를 괴롭혀 댔다. 

 

   기초 주력 수업이 자습으로 바뀌었단 소식을 들은 쿠기사키는 파우치를 꺼내 들더니 화장을 시작했다. 뷰러가 신기한 듯 달칵거리고 있는 이타도리 또한 자연스레 땡땡이에 동참한다. 너희 통장에 돈은 남아있냐. 물으니 두 사람은 당연한 턱 끝으로 메구미를 한 번 가리켰다. 눈치 빠른 것들. 속으로 힐난한 메구미는 고등학생에겐 과분한 현금과 신용 카드를 찔러주던 고죠를 떠올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나가서 놀고 와. 청춘은 즐겨야지! 그렇게 말하는 고죠는 언젠가부터 청춘이라는 단어를 빌미로 메구미를 이타도리와 쿠기사키가 있는 울타리 안에 마구 욱여넣고 있었다. 물론 그의 말대로 두 사람과 청춘을 즐기는 게싫단 의미는 아니었다. 외려 메구미의 허름한 사회망 속 가장 빛나는 물질이 두 사람이었으므로, 스멀스멀 피어나는 사념은 친애하는 친구들과는 별개다. 메구미는 엄지를 슬쩍 물어본다. 육안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이든 다 볼 수 있는 걸까? 감정이나, 숨겨둔 비밀 같은 것도.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고죠가 저보다 훨씬 어른이기 때문일까. 그에겐 쉬워 보이는 거리 조절이 메구미에게는 지상 최대의 과제나 다름없었다. 이건 츠미키가 쓰러진 이후부터다. 암만 미세하다 해도 고죠의 변화는 그 자체로 불안이었고, 메구미는 몇 없는 관계에 골몰하는 경향이 있었으니 이제 와 그와 다른 길을 걷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놀러 갈 때마다 화장하는 거 불편하지 않아?" 

   "너 보라고 하는 거 아니거든? 이건 기분 문제라고." 

   "아, 아니. 누가 보겠대?" 

   "준비된 자에게 복이 온다. 이런 말도 몰라? 모델 제의를 받을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괜찮은 남자가 꼬일지도." 

   "헤에." 

   "…근데 내가 이런 얘길 왜 너랑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누가 아니래." 

 

   이날의 두 번째 이변은 그렇게 시작됐다. 두 사람이 타이밍 나쁘게도―혹은 좋게도.―연애에 대한 담론을 개시했다는 것. 쿠기사키는 의외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말했다. 민망해하진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도 본인 수준에 맞는 남자가 그간 없었다고 했다. 반면 이타도리는 의외로 연애를 해봤다고 했다. 매우 민망해했다. 그 말에 쿠기사키가 거짓말! 하며 소리를 빽 질렀다. 책상에서 떨어진 마스카라를 메구미는 대신해 집어 올렸다. 이타도리는 단상에 올라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받는 정치인처럼 황급히 변호를 해댔다. 그렇지만 첫사랑은 아직 없어. 그땐 초등학생이었다고! 외치고서야 쿠기사키는 그럼 그렇지. 하며 반대쪽 눈썹의 빈 곳을 마저 채워 넣는다. 메구미는 귀 끝이 빨개진 이타도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머쓱해하는 단단한 등짝 또한. 

 

   연애같이 간지러운 이야기는 첫 키스 따위로 주제를 옮겨가기 마련이었다. 우리 중에 키스해 본 사람은 없겠지? 쿠기사키의 자조적인 물음에 이타도리와 메구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렴 사랑이란 정의 앞에 놓기에 그들은 어렸다. 쿠기사키가 파우치를 정리하고 손바닥만 한 가방을 챙길 동안, 메구미는 여전히 고죠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키스를 해봤을까? 하긴. 그 나이에 안 해봤으면 그것도 문제가 심각할지 몰라. 심심찮게 선 자리에 끌려 나가던 고죠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고죠도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것이다. 늘 제멋대로인 남자처럼 오해받지만 일을 할 때라거나, 특히 고죠 가에 한해 그는 몹시 성실했다. 왠지 열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당신과 같은 나이가 되어서도 누군가와 키스하는 내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데. 멍하던 메구미는 발걸음을 옮긴다. 심란한 마음에 끼어든 논제가 조금씩 결말의 방향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날 세 사람은 긴자의 유명 스시집 아라이에서―인당 3만 엔에 가까운 돈이 부과되었다.―점심을 먹었고, 후식은 앙리 샤르팡티에의 크레이프 슈제트와 딸기 케이크를 즐겼다. 단 디저트를 선호하지 않는 메구미는 그날따라 구움 과자니, 초콜릿 묻은 마카롱을 잔뜩 골라 결제했다. 일련의 사건들로―고죠의 25만 엔짜리 셔츠를 조진 날을 포함이다.―메구미가 고죠의 재력을 갉아먹는 데에 일말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과, 고죠 또한 메구미에게 들이는 돈은 도통 자제할 의지가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타도리와 쿠기사키가 보기에도 메구미의 행태가 과도했다. 정작 본인은 옆에 앉아 블랙커피나 홀짝이고 있었던 주제에 카페를 나가면서도 케이크를 한 짐 가득 구매하더란다. 쿠기사키에게 옆구리를 급습당한 이타도리는 토해내는 것처럼 물어야 했다. 후시구로. 혹시 화났어? 메구미는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맛있게 먹길래 선배들 줄 것 산 거야. 누구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답변의 주인은 모르는 체했다. 다음으론 끝도 없는 쿠기사키의 아이쇼핑이 이어졌다. 주로 이타도리가 짐을 들었고, 메구미는 쿠기사키가 좋아할 만한 장소를 검색해 주었다. 2만 보를 걷고, 다리가 아파질 때쯤엔 가라오케를 갔다. 

 

   아마도, 그날의 이변 중 세 번째가 가장 극적이었을 것이다. 사건은 해가 뉘엿뉘엿 산을 기어가는 때에. 주홍빛 장막이 내린 하늘 사이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고전으로 돌아오는 도중 일어났다. 멀리서도 들릴 만치 깔깔거리며 웃던 세 사람은―따지자면 두 사람이지만.―곧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인영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묘사하자면 그것은 백발의 수상한 남자. 경박하고 개인주의적인 바보 선생. 아무튼 은인. 그러니까, 고죠 사토루를 닮은 물체가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주술고전의 정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제일 먼저 입 밖으로 꺼낸 건 이타도리였다. 

 

   "어라. 고죠 선생님 벌써 온 거야?" 

 

   의문스런 물음에 바닥서 구르는 솔방울을 보고 있던 메구미가 고개를 쳐들며 반대 의견을 내비쳤다. 

 

   "그럴 리가 없잖아." 

 

   단호하던 말끝은 이내 흐려졌다. 이따금 둘이 영화 보러 갈 때면 그가 뿌리던 향수와 같이, 강렬하지만 따뜻하고도 익숙한 주력이 온몸에 퍼부어진 탓이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메구미를 살피는 이타도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의심할 바 없이 고죠가 맞았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고죠는 오늘 급히 해외를 나가야 했고, 싱가포르는 일본으로부터 다소 거리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임무가 취소되었다고 한들 잘 가던 비행기 앞머리를 돌릴 순 없었을 테니까. 아무리 고죠라해도 말이지. 게다가, 저 멀리 땅을 딛고 선 가짜는 아침에 나설 때와는 언뜻 흡사하면서도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가늘게 눈을 뜬 메구미는 그것이 태초의 기억으로부터 한동안 유지되던 고죠의 복장임을 알았다. 

 

   교복 말이다. 

 

   "…아니야. 저건 고죠 선생님이 아니야." 

 

   이변을 가장 빠르게 파악한 건 메구미였다. 그는 옥견을 불러내며 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막아섰다. 등 뒤로 쿠기사키가 망치를 꺼내 드는 짤그락 소리를 들었다. 그동안 고죠의 탈을 뒤집어쓴 주령은 전투태세인 세 사람을 보고도 한동안 자리를 지키는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신호를 받은 옥견이 사나운 소리를 내며 달려들 때까지도 지속되었는데, 다음 순간 메구미는 몹시 당혹스런 사태를 목도하게 됐다. 옥견들이 고죠를 닮은 주령을 물어뜯긴커녕 그의 발치를 킁킁대며 빙글빙글 돌았던 것이다! 자리에 얼어붙은 메구미의 입이 황망히 벌어졌다. 용맹한 강아지들은 죄가 없다. 저 멍청한 표정은 정말이지 똑같이 카피했네. 그따위 잡생각에 정신이 팔린 술사가 잘못이지. 야, 너네…! 외치는 개주인 메구미를 보고 웃음이 터진 이타도리와 쿠기사키 덕분에 긴장감은 완전히 부서졌다. 따라서 뭇 상황에서도 팽팽 잘만 돌아가던 메구미의 머리까지 멈추고 말았다. 어쩌면 온종일 심상 변두리서 도사리던 이름 모를 감정을 섣불리 정의 내리려 했던 탓일지 모르지. …젠장,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익숙한 질문은 메구미로 하여금 자연히 고죠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어떤 어려움도 해결해 주니까. 쉽게 자아를 잃지도 않고, 겁을 집어먹는 일도 없으니까. 메구미는 바로 앞까지 걸어온 남자를 올려다보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죠를 떠올리고 있었다. 

 

   선빵을 맞을뻔한 상대에게선 일말의 호전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 사토루는 공격 대신 꺼벙한 눈을 깜빡이며 메구미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흠칫하더니 커다란 손바닥 안으로 안면을 감춘다. 갈라졌던 시선을 손가락 사이로 다시 맞부딪힐 즈음엔 메구미의 옥견이 그림자 속으로 돌아갔다. 와…. 처음 봐. 사토루가 중얼거린다. 새하얀 머리카락도, 주력도, 하는 짓거리조차도 모조리 고죠가 맞았다. 골백번은 보아온 아름다운 얼굴. 단단한 육체와 누구에게도 상처 입지 않는 고결한 영혼을, 메구미는 분명히 느꼈다.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사지가 따로 놀듯 어색한 몸가짐도 의문스럽긴 하지만. 고죠 사토루는 시대의 필연이다. 메구미는 감히 고죠가 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냥 이 인간이 오늘도 기행을 벌이는구나, 이해하는 게 빨랐다. 바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코스프레나 하고 놀고 있었던 거라고. 이런 걸로 내가 놀랄 줄 알아? 헤아리던 메구미의 추측은 금방 작살이 나고 만다.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갑자기 교복은 왜…." 

   "젠인…, 아니. 너 이름. 이름이 뭐야?" 

   "예?" 

 

   예상치 못한 전개에 메구미는 뒷걸음질 쳤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덥석 팔목을 붙잡은 사토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울지던 노을도 감추지 못할 만큼 빨갛게. 파랗던 홍채도 채하를 담아 핑크빛이다. 닿은 곳이 축축했다. 그는 약간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고죠 선생님이 아니야? 

 

   고개를 기울인 메구미가 육안 속 눈부처를 빤하니 들여다보자, 이번엔 사토루가 퍼뜩 물러섰다. 자유가 된 팔을 매만지며, 메구미는 오늘 아침 야가의 메시지를 읽기 위해 까치발을 들어야 했던 본인을 반추했다. 그랬더니 상대방의 키가 미묘하게 작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뿐만 아니다. 단단하던 턱은 끝이 뾰족하고, 양 뺨이 뽀득한 사과처럼 둥글게 솟아 있다. 미풍에 인사하듯 흔들리는 은빛의 머리카락마저도. 새끼 고양이의 털처럼 더 엷어 보였다. 그래서 깨닫게 됐다. 

 

   이 순간, 열아홉을 목전에 둔 그를 지금 와 재회하게 되었다는 걸. 

 

   그건 인식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마치 기억이 날듯 말 듯 하던 단어를 드디어 기억해 낸 것처럼. 오랜만에 두발자전거를 타게 된 것처럼. 물에 빠져 수영하는 것처럼. 항상 완성된 어른 같았던 고죠 사토루. 당신이…, 이렇게 여린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놀란 메구미의 귓속에 어린 날의 음성이 날아와 콱 박혔다. 후시구로 메구미지? 하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그랬던 그는 이제 내 이름을 묻고 있다. 

 

   하루의 시작부터 고죠가 수업을 하고 싶지 않다 고집부렸던 것. 그런 그를 고전에서 쫓아내기라도 하듯 긴급이 붙을 정도의 임무가 생겨버린 것. 친구들과 연애 문제에 대해 떠들었던 것. 그의 첫 키스를 몰래 상상해 보았던 것. 하필이면 밖에서 실컷 놀다 들어오느라 충격적 대이변을 처음 발견하게 된 것. 때마침 진짜 고죠에게서 전화를 수신받은 스마트폰이 징징 울려대고 있는 것마저도. 휴대전화를 들어 올리며, 메구미는 근거 없는 확신을 믿고 싶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모두가 당신을 만나기 위함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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